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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문, 울분이 일었다 판결문 [나는 그들이 한 짓을 알고 있다 – 서른여섯 번째 이야기] 판사의 판결은 정확해야 한다. 객관성은 당연히 필수다. 검사의 공소장이나 변호인 변론서에 담긴 내용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주관대로, 멋대로 판단하는 것은 판사의 권한이 아니다. 당신들 스스로 좌파 판사니 뭐니 하는 말을 듣는 짓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 시리즈를 마치면 로스쿨 학생들에게 이 사건 내용 전문을 전달할 계획이다. 학생들에게 이런 일이 있어선 안 된다는 교훈과 과연 수사기관의 수사과정 그리고 판결이 옳은지 어린 학생들의 의견을 묻고자 함이다. 판사는 무엇을 근거로 그 따위 판단을 했을까!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이제 판결만 남았다.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아쉬운 건 이 사건은 정치적으로 접근했어야 한다는 것이.. 나는 그들이 한 짓을 알고 있다(연재) 2024. 11. 3.
동래 정씨 가문의 역사와 전통을 찾아서 이번 글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명문가 중 하나인 동래 정씨(鄭氏)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신라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온 이 가문의 역사는 마치 한 편의 대하소설처럼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바닷가의 작은 고을에서 시작된 천년 가문동해 바다를 마주한 작은 고을 동래, 오늘날의 부산 지역인 이곳은 원래 장산국 또는 내산국이라 불리던 독립된 소국이었습니다. 신라에 편입된 후 동래군이 된 이곳에서, 한 가문의 위대한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신라의 여섯 부촌 중 하나였던 진지촌의 촌장 지백호의 후손들이 이곳에서 뿌리를 내렸고, 그중 정회문이라는 인물이 동래 정씨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안일호장이라는 직책을 맡았던 그는 백성들을 위한 선정을 베풀어 큰 신망을 얻었다고 합니다.고려시대 - 문학과 청백리의 .. 본관 성씨 이야기 2024. 11. 3.
진주 하씨 경태보 한국의 오래된 두번 째 오래된 족보 우리나라 대표적 성씨 중 하나인 진주 하씨(河氏)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진주 하씨는 경상남도 진주를 본관으로 하는 가문으로, 고려시대부터 현재까지 많은 명현과 충신을 배출했습니다. 2015년 기준, 약 226,143명에 이르는 진주 하씨들이 곳곳에서 선조들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진주 하씨의 시작, 그리고 세 개의 큰 줄기진주 하씨의 역사는 백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비록 정확한 문헌은 남아있지 않지만, 백제 때부터 사대부의 문벌이었다고 전해져 오는데요.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는 진주(당시 진양) 지역의 대표적인 토착 호족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특히 고려 개국 당시 태조 왕건과 협력하여 토성(土姓)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어, 이 시기부터 진주 하씨의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 본관 성씨 이야기 2024. 11. 2.
이름 영문표기법 가이드 이름 영문표기는 글로벌 시대에 매우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여권 발급부터 해외 거래, 국제 문서 작성, 국내외 많은 문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황에서 영문 이름이 필요합니다. 정확한 이름 영문표기는 개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동시에 국제적인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중요한 수단입니다.이름 영문표기 기본 원칙성명 구성 순서우리나라 사람들의 이름은 전통적으로 성-이름 순서로 표기합니다. 이는 우리나라의 문화적 정체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주요 국제 언론과 기관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자면, '홍길동'의 경우 'HONG GILDONG'으로 표기합니다.표기 방식이름 영문표기는 아무렇게나 개별적으로 창조하는 것이 아닌 문화체육관광부가 정한 로마자 표기법에 따라 음절 단위로 음역에 맞게 표기해야 합니.. 본관 성씨 이야기 2024. 11. 1.
무안 박씨 시대별 주요 인물과 미래 지향적 활동 무안 박씨의 역사와 특징에 대해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무안 박씨는 우리나라의 많은 성씨들 중에서도 독특한 역사와 문화적 유산을 자랑하며, 이 포스팅에서는 그들의 시조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주요 인물, 역사적 사건, 문화재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무안 박씨 시조와 유래무안 박씨의 시조는 박진승(朴進昇)입니다. 박진승은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여섯째 아들인 완산대군 박언화의 5세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려시대 박진승은 문과에 급제하여 국자제주를 지내며, 나라에 큰 공을 세워 무안을 식읍으로 하사 받았습니다.역사적 인물무안 朴氏는 역사적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주요 인물들이 있습니다.주요 인물들박섬(2세) : 고려 현종 때 .. 본관 성씨 이야기 2024. 10. 31.
해주 최씨의 천년 역사와 전통 탐구 한국의 전통 성씨 중 특별한 위상을 지닌 해주 최씨(崔氏)는 고려시대부터 현재까지 천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오며 우리나라의 정치, 문화, 교육 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겨왔습니다. 황해남도 해주를 본관으로 하는 이 가문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현대적 계승에 대해 상세히 알아보고자 합니다.해주 최씨 시조와 가문의 영광스러운 시작해주 최씨의 시조인 최온(崔溫)은 고려 성종 시대에 해주의 목민관으로서 판이부사를 지낸 인물입니다. 그는 뛰어난 행정력과 청렴한 품성으로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으며, 이는 후대 해주 崔氏가 명문가로 성장하는 초석이 되었습니다.가문의 진정한 도약은 시조의 아들인 최충(崔冲)으로부터 시작됩니다. 1005년 과거에 장원급제한 최충은 개부의동삼사, 문하시중 등 고위직을 역임하며 국가 발전에 큰 공.. 본관 성씨 이야기 2024. 10. 30.
법정 진술의 신빙성 문제와 증거 수집 절차 적법성 논란 법정 진술의 신빙성 문제와 증거 수집 절차 적법성 논란  [나는 그들이 한 짓을 알고 있다 – 서른다섯 번째 이야기-1] 변호인이 법정에 제출한 의견서에 모든 내용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문제는 이 사건을 한낱 내게 감정이 있었던 추형오와 방호석 이장이 '거짓으로 꾸민 음모'로 한정했다는 것이다. 수차례 이 사건은 정치적인 쪽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했지만, 변호인은 '유리할 게 없다'는 이유만 내세웠다. 만일 처음부터 이 사건의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면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어제 한 지인으로부터 꽃 선물을 받았다. 화분 한가운데 '이제부터 시작이야'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말로 읽혔다. 지인께 머리 숙여 감사 인사를 드린다. 방 이장이 내게 갖고 있던 사적 감정.. 나는 그들이 한 짓을 알고 있다(연재) 2024. 10. 29.
충과 효의 상징 영양 천씨(潁陽 千氏) 가문을 말하다 이번 포스팅은 한국의 명문가 중 하나인 영양 천씨(千氏) 가문의 역사와 전통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자 합니다. 충과 효를 중시하며 나라와 가문을 위해 헌신해 온 영양 천씨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시겠습니다.시조와 본관의 유래영양 천씨의 시조인 천암(千巖)은 중국 서촉 종북산(현재의 사천성 성도 남부) 아래 천고봉 만인암에서 태어났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선조의 이름이 출생지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인데, 천고봉의 '천(千)'을 성으로, 만인암의 '암(巖)'을 이름으로 하여 '천암'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본관인 영양(潁陽)은 중국 하남성 등봉현의 영양진에서 유래했습니다. 이곳은 고대 중국의 왕도였던 낙양과 정주 사이의 쑹산 근처에 위치한 유서 깊은 곳으로, 가문의 역사적 정통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본관 성씨 이야기 2024. 10. 29.
나주 정씨 나주압해정씨족보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완전한 족보 수많은 성씨 중에서도 독특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나주 정씨(羅州丁氏)는 고려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역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두각을 나타내며 우리 사회의 발전에 기여해 왔습니다. 오늘은 이 명문가의 역사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나주 정씨 시조와 본관의 역사나주 정씨의 시조는 고려 중기의 무신 정윤종(丁允宗) 검교대장군입니다. 백성들이 그의 공덕을 기리며 송덕비를 세울 정도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흥미로운 점은 본래 이들의 본관이 압해(押海)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영조 시대에 이르러 압해현이 폐현되면서 나주로 본관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행정구역의 변화를 넘어, 가문의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대동항렬표로 보는 가문의 체계나주 .. 본관 성씨 이야기 2024. 10. 28.
대한민국의 명문가 의령 남씨(宜寧南氏)와 남이 장군 탐구 의령 남씨와 남이 장군에 대한 포스팅입니다. 755년 일본으로 향하던 한 배가 거센 풍랑을 만나 경북 영덕 해안가에 정착했습니다. 당나라 여남 출신의 김충(金忠)은 그렇게 신라 땅을 밟게 되었고, 경덕왕은 그의 출신지를 따라 '남(南)'이라는 성을 하사했습니다. 이것이 의령 남씨의 시작입니다.가문의 형성과 발전삼형제와 세 개의 본관남씨 가문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은 남진용의 세 아들 때였습니다. 세 형제는 각자 다른 지역에 정착하며 세 개의 본관을 이루게 됩니다. 장남 남홍보는 영양을, 차남 남군보는 의령을, 삼남 남광보는 고성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이중 차남 남군보의 후손들이 바로 오늘날의 의령 南氏입니다.의령 남씨의 시대별 주요인물고려시대남민(南敏) : 원시조로, 당나라 출신으로 신라에 귀화.. 본관 성씨 이야기 2024. 10.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