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재보살, 스스로 바라보는 사람이 되라

경전 이야기 ·

대현스님과 함께 쓴 책 『260자에 담긴 인생』의 제6장을 전해 드립니다. 제2부의 첫 장으로, 이제 경문 속으로 한 걸음씩 들어갑니다. 반야심경의 첫 낱말인 ‘관자재보살’이라는 이름 하나를 오래 들여다보는 장입니다.

이 장의 경문

觀自在菩薩
관자재보살
자유자재로 바라보는 보살께서

거울은 매일 보면서

아침에 일어나면 우리는 거의 빠짐없이 거울 앞에 섭니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얼굴에 무엇이 묻지 않았는지 살핍니다. 나이가 들면 거울 속에서 새로 생긴 주름이나 흰머리를 발견하고 한숨을 쉬기도 합니다. 하루에 몇 번씩, 평생 수만 번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살아온 셈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굴은 그렇게 자주 들여다보면서, 내 마음은 몇 번이나 들여다보았을까요? 오늘 아침 내 마음에 어떤 표정이 있었는지, 어제 저녁 어떤 걱정이 마음에 묻어 있었는지 살펴본 적이 있으신지요. 얼굴에 묻은 밥알 하나는 금세 알아채면서, 마음에 덕지덕지 붙은 서운함과 불안은 몇 년씩 모른 채 지내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얼굴은 거울에 비치지만 마음은 비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비추는 거울은 따로 마련해야 합니다. 그 거울이 무엇인지, 어떻게 닦아야 하는지를 일러 주는 경전이 반야심경입니다. 그리고 그 거울 앞에 맨 처음 서 있는 분이 바로 관자재보살입니다.

반야심경의 첫 낱말은 ‘관자재보살’입니다. 이 이름에는 ‘바라본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260자 경전이 맨 처음 우리에게 건네는 말이 ‘바라보는 이’의 이름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이 장에서는 그 이름 하나를 오래 들여다보려 합니다.

관자재와 관세음, 두 이름 한 보살

‘관자재보살’이라는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는 분도 ‘관세음보살’이라는 이름은 익숙하실 것입니다. 절에서 “나무관세음보살”을 염송하는 소리를 한 번쯤 들어 보셨을 테니까요. 사실 두 이름은 같은 보살을 가리킵니다. 산스크리트어 이름은 ‘아발로키테슈바라(Avalokiteśvara)’입니다.

같은 보살을 왜 두 가지 이름으로 부를까요? 산스크리트어 이름을 어떻게 끊어 읽느냐에 따라 뜻이 조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한쪽으로 읽으면 ‘바라봄이 자유자재한 분’이 되어 현장 스님은 ‘관자재(觀自在)’라고 옮겼습니다. 다른 쪽으로 읽으면 ‘소리를 바라보는 분’이 되어, 구마라집 스님 같은 앞 시대 번역가들은 ‘관세음(觀世音)’, 곧 세상의 소리를 살피는 분이라고 옮겼습니다. 어느 쪽이 본래 이름인지를 두고는 학자들 사이에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두 이름은 이 보살의 두 얼굴을 보여 줍니다. ‘관세음’은 고통받는 이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달려가 건져 주는 자비의 얼굴입니다. 『법화경』에는 괴로움에 빠진 이가 이 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그 소리를 듣고 구해 준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관음 신앙이 깊이 뿌리내린 것도 이 자비의 얼굴 덕분입니다. 강원도 양양 낙산사의 홍련암,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사처럼 관음보살을 모신 바닷가 기도처들은 지금도 많은 사람이 찾는 곳입니다.

반면 반야심경이 부르는 ‘관자재’는 지혜의 얼굴입니다. 이 경에서 관자재보살은 누군가를 건져 주는 분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스스로 깊이 바라보고, 스스로 괴로움을 건넌 분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사리자에게 들려줍니다. 2장에서 보았듯이 경의 이야기는 부처님이 아니라 이 보살이 사리자에게 지혜를 일러 주는 모습으로 펼쳐집니다. 반야심경 속의 관자재보살은 구원자라기보다, 먼저 길을 걸어 본 선배이자 스승인 셈입니다.

바라봄이 자유를 낳는다

이제 ‘관자재’ 세 글자를 하나씩 풀어 보겠습니다. ‘관(觀)’은 ‘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눈으로 대충 훑어보는 것이 아니라 깊이, 자세히,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한자를 뜯어보면 황새가 물가에서 꼼짝하지 않고 물속을 응시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고 풀이하기도 합니다. 서두르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바라보는 눈입니다.

‘자재(自在)’는 ‘스스로 있다’, 곧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롭다는 뜻입니다. 우리말에서도 ‘자유자재로 다룬다’고 할 때 이 말을 씁니다. 걸리는 데 없이, 끌려다니지 않고, 제 뜻대로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연을 날려 본 분은 아실 것입니다. 연줄을 쥔 사람이 바람을 읽을 줄 알면 연은 하늘에서 자유롭게 춤을 춥니다. 그러나 바람을 보지 못하면 연은 이리저리 휘둘리다 결국 나무에 걸리고 맙니다. 자재란 바람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바람을 읽으며 휘둘리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러니 ‘관자재’를 이어 읽으면 ‘바라봄이 자유로운 분’, 또는 ‘바라보아서 자유로워진 분’이 됩니다. 여기에 반야심경 전체를 꿰뚫는 비밀 하나가 숨어 있습니다. 자유는 바라봄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에 끌려다닐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화가 나서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을 때, 걱정에 사로잡혀 밤을 지새울 때, 그때 우리는 그 감정을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다. 감정 속에 푹 잠겨 있습니다. 물속에 빠진 사람은 물을 볼 수 없습니다.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야 비로소 물이 보입니다. 그리고 물이 보여야 헤엄쳐 나올 방향도 보입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이렇게 한 걸음 물러서서 고개를 내미는 일입니다. 그 한 걸음이 우리를 끌려다니는 사람에서 자유로운 사람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일상에서도 이런 경험을 하실 수 있습니다. 누군가와 말다툼을 하다가 문득 ‘내 목소리가 너무 커졌구나’ 하고 알아차린 순간이 있으셨을 겁니다. 그 순간 신기하게도 목소리가 조금 낮아집니다. 화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화가 나를 끌고 다니던 힘은 분명히 약해집니다. 바라보는 눈이 잠깐 열렸기 때문입니다. 관자재보살은 그 눈이 늘 열려 있는 분입니다. 우리는 가끔 열리고 자주 닫히지만, 열리는 순간이 잦아질수록 우리도 그만큼 자유로워집니다.

보살, 깨달음을 향해 걷는 사람

이름의 마지막 두 글자 ‘보살(菩薩)’도 살펴보겠습니다. 보살은 ‘보리살타(菩提薩埵)’를 줄인 말이고, 산스크리트어 ‘보디사트바(bodhisattva)’의 소리를 옮긴 것입니다. ‘보디’는 깨달음, ‘사트바’는 살아 있는 존재를 뜻합니다. 이어서 풀면 ‘깨달음을 향해 가는 존재’가 됩니다.

대승불교에서 보살은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모든 생명을 이끌어 함께 건너가려는 사람입니다. 나 혼자 괴로움을 벗어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이웃의 괴로움까지 내 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3장에서 대승불교를 ‘모두 함께 건너가자는 흐름’이라고 말씀드린 것이 바로 이 보살의 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절에 다니는 여성 신도를 흔히 ‘보살님’이라고 부릅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들릴 수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참 아름다운 호칭입니다. 부엌에서 공양을 짓고, 남의 아픔에 함께 눈물짓는 그 마음이 곧 보살의 마음이라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먼 하늘에만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깨달음을 향해 한 걸음이라도 내딛으며 남을 아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살의 길 위에 있습니다.

보살이라는 말에서 위로가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보살은 ‘다 이룬 사람’이 아니라 ‘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아직 부족하고, 아직 흔들리고, 아직 실수하면서도 깨달음을 향해 걸음을 멈추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오늘 화를 냈다고, 어제 남을 미워했다고 보살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바라보고 다시 걸으면 됩니다.

내 안의 관자재보살

이 장의 부제를 ‘스스로 바라보는 사람이 되라’고 붙였습니다. 반야심경을 마음공부의 눈으로 읽는 많은 분들은 관자재보살을 경전 속의 먼 인물로만 보지 않습니다. 내 안에도 바라볼 줄 아는 눈이 있고, 그 눈을 뜨는 순간 나 역시 관자재, 곧 바라봄으로 자유로워지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읽습니다. 경전이 이것을 그대로 말한 것은 아니지만, 이 경을 내 삶의 이야기로 읽는 하나의 소중한 방법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평생 남을 바라보며 살아왔습니다. 남의 눈치를 보고, 남의 성공을 부러워하고, 남의 잘못을 탓했습니다. 자식은 왜 저럴까, 배우자는 왜 이럴까, 세상은 왜 이 모양일까. 그 눈길이 늘 바깥을 향해 있었습니다. 관자재보살은 그 눈길을 안으로 돌리라고 말합니다. 남을 바꾸려 애쓰기 전에, 그 일 앞에서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먼저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는 작은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나를 마치 남처럼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화가 나 미치겠다’ 대신 ‘이 사람이 지금 몹시 화가 나 있구나’ 하고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랜 친구를 보듯 따뜻하게, 그러나 휩쓸리지 않고 지켜보는 눈입니다.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몇 번 해 보면 마음이 한결 넉넉해지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바깥을 보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관세음보살의 다른 얼굴이 보여 주듯, 세상의 아픔에 귀 기울이는 일도 소중합니다. 다만 안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바깥도 더 바르게 봅니다. 내 마음의 흔들림을 아는 사람은 남의 흔들림도 너그럽게 봅니다. 내 안의 관자재가 깨어날 때, 내 밖의 관세음도 함께 깨어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이 바라봄은 오히려 쉬워질 수 있습니다. 젊어서는 앞만 보고 달리느라 멈추어 설 틈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걸음이 느려진 만큼 주변도, 내 안도 더 잘 보입니다.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면 그때는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무엇이 그토록 두려웠는지도 조금은 보입니다. 그렇게 돌아보는 눈이 바로 관자재의 눈입니다. 늙어 간다는 것은 어쩌면 바라보는 눈이 깊어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십시오. 나는 몇 번이나 내 마음을 바라보았습니까? 그리고 몇 번이나 남만 바라보았습니까? 스스로 바라보는 사람이 되는 일은 거창한 수행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하루에 한 번, 거울 앞에서 얼굴을 살피듯 마음을 살피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 작은 바라봄이 쌓일 때, 260자의 첫 낱말은 경전 속 이름이 아니라 나의 이름이 됩니다.

오늘의 마음공부

1. 거울 앞에서 마음 한 번 보기

내일 아침 거울을 볼 때, 얼굴을 살핀 다음 잠시 눈을 감고 ‘지금 내 마음의 얼굴은 어떤가?’ 하고 물어보십시오.

2. 감정 속에서 고개 내밀기

오늘 화나 걱정이 올라오면 속으로 ‘관자재’ 세 글자를 한 번 불러 보십시오. 감정에 잠긴 나를 물 밖으로 꺼내는 신호로 삼는 것입니다.

3. 눈길을 안으로 돌리기

오늘 누군가가 못마땅했다면 저녁에 그 장면을 떠올려, 그 사람이 아니라 그때의 내 마음이 어땠는지 한 줄로 적어 보십시오.

한 줄 새김

바라보는 순간, 끌려다니던 나는 자유로운 나로 바뀝니다.

『260자에 담긴 인생』 만나 보기

이 글은 책의 제6장입니다. 책에서는 이어서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무엇을 보았는지, 그리고 ‘조견오온개공’의 깊은 뜻을 한 구절씩 우리 삶에 비추어 읽어 나갑니다. 화, 걱정, 이별, 늙음, 죽음처럼 저마다 앞에 놓인 삶의 강을 건너는 지혜를 장마다 ‘오늘의 마음공부’와 ‘한 줄 새김’으로 함께 담았습니다. 곁에 두고 하루 한 장씩 천천히 펼쳐 보시기 바랍니다.

앞 장인 마음공부란 무엇인가, 반야심경을 읽는 자세와 ‘반야심경’ 제목 안에 모든 것이 있다, 반야심경 전문 읽기도 함께 읽어 보세요. ‘관세음’이라는 자비의 얼굴이 궁금하시면 관세음보살은 어떤 분일까, 부처이면서 보살로 남은 분도 이어서 읽어 보시면 좋습니다. 반야심경을 읽거나 사경하며 느낀 이야기는 게시판에 함께 나눠 주세요. 다른 이야기는 불교이야기 목록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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