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음보살은 어떤 분일까, 부처이면서 보살로 남은 분

불교 기초 ·

책 『관세음보살은 버스 정류장에도 계신다』의 제1장을 전해 드립니다. “아이고, 관세음보살” 하고 늘 부르면서도 막상 잘 모르는 관세음보살이 어떤 분인지, 경전 말씀과 우리 삶의 이야기로 쉽게 풀어 보는 장입니다.

아이고, 관세음보살

옛 어른들은 놀라면 이 말부터 했습니다. 장독 뚜껑이 바람에 날아가도, 아이가 마루 끝에서 굴러떨어질 뻔해도 “아이고, 관세음보살” 하셨지요. 절에 다니지 않는 분도 이 말은 압니다. 그만큼 관세음보살이라는 이름은 우리 삶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이런 분이 있었습니다. 일흔을 넘긴 할머니였습니다. 평생 장터 한쪽에 앉아 채소를 파셨지요. 손님이 값을 깎다 못해 언성을 높여도 할머니는 그저 “관세음보살” 하고 웃으셨답니다. 누가 왜 그러시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야 내 속이 편해. 저 사람도 오죽하면 저러겠어.”

그런데 막상 관세음보살이 누구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부처님인지 보살님인지,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인지 또렷하게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요. 이 책은 우리가 매일 만나는 관세음보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이분이 누구인지부터 알아야겠습니다.

세상의 소리를 보는 분

관세음(觀世音)이라는 이름을 한 글자씩 풀어 보면 뜻이 또렷해집니다. ‘관’은 본다는 뜻이고, ‘세음’은 세상의 소리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소리를 보는 분, 그분이 관세음보살입니다.

소리는 듣는 것인데 왜 ‘본다’고 했을까요. 여기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귀로 듣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소리를 내는 사람의 마음까지 살핀다는 말이지요. 울음 섞인 목소리 뒤에 숨은 두려움, 화난 목소리 뒤에 숨은 서러움까지 보시는 분입니다.

이 이름의 뜻은 『법화경(法華經)』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에 나옵니다. 흔히 줄여서 「보문품」이라고 부르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무진의보살이라는 분이 부처님께 여쭙니다. 관세음보살은 무슨 까닭으로 관세음이라 부릅니까. 부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선남자여, 만약 한량없는 백천만억 중생이 여러 가지 괴로움을 받을 때, 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한마음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곧 그 음성을 살펴보고 모두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

괴로운 사람이 한마음으로 부르면, 그 소리를 놓치지 않고 살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옛 어른들이 놀랄 때마다 관세음보살을 찾은 것도 이 믿음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은 다른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은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지요. 관자재는 ‘걸림 없이 자유롭게 보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같은 분을 두고 옮긴 사람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붙인 것입니다. 우리가 읽는 『법화경』을 옮긴 구마라집(鳩摩羅什)은 ‘관세음’이라 했고, 『반야심경』을 옮긴 현장(玄奘)은 ‘관자재’라 했습니다.

세상의 소리를 살피는 분, 그리고 걸림 없이 보는 분. 두 이름을 나란히 놓으면 관세음보살이 어떤 분인지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남의 아픔을 가려듣지 않고, 치우침 없이 있는 그대로 보시는 분이지요.

이미 부처가 되신 분

그런데 관세음보살에 관해 많은 분이 모르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은 아주 오래전에 이미 부처가 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보살(菩薩)’은 본래 ‘보리살타’를 줄인 말입니다. 깨달음을 구하면서 다른 사람도 함께 건지려는 이를 가리키지요. 보통은 부처가 되기 전의 단계로 이해합니다. 그러니 부처가 된 분을 보살이라 부른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게 들리실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천수천안관세음보살대비심다라니경(千手千眼觀世音菩薩大悲心陀羅尼經)』에 나옵니다. 우리가 절에서 자주 듣는 「천수경」의 뿌리가 되는 경전입니다. 이 경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관세음보살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관세음보살은 헤아릴 수 없는 위신력을 지녔으니, 이미 지난 한량없는 세월 전에 부처가 되어 그 이름을 정법명여래(正法明如來)라 하였느니라. 크게 슬퍼하는 원력으로, 모든 보살의 마음을 일으키고 중생을 편안하게 하여 성숙시키고자 보살의 모습으로 나타났느니라.

— 『천수천안관세음보살대비심다라니경』

정법명여래는 ‘바른 법을 환히 밝힌 여래’라는 뜻입니다. 여래는 부처님을 높여 부르는 이름이지요. 관세음보살은 이미 바른 법을 환히 밝힌 부처였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보살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관세음보살은 높은 자리를 마다하고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분입니다.

왜 보살로 남으셨을까

부처가 되었으면 그 자리에 머물러도 될 텐데, 왜 다시 보살의 모습으로 오셨을까요. 경전은 그 까닭을 한마디로 말합니다. ‘대비원력(大悲願力)’ 때문이라고요. 크게 슬퍼하는 마음, 그리고 그 마음에서 나온 간절한 바람입니다.

여기서 ‘슬퍼한다’는 말은 그냥 슬프다는 뜻이 아닙니다. 남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느끼는 마음입니다. 불교에서는 자비(慈悲)를 흔히 이렇게 풀이합니다. ‘자’는 기쁨을 주는 마음이고, ‘비’는 괴로움을 덜어 주는 마음이라고요. 관세음보살을 ‘대자대비하신 보살’이라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장면을 떠올려 보면 쉽습니다. 큰 강이 있습니다. 며칠째 비가 와서 흙탕물이 거세게 흐릅니다. 한 사람이 겨우 강을 건너 저쪽 언덕에 닿았습니다. 이제 그 사람은 안전합니다. 젖은 옷을 말리고 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건너편에 아직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아이를 업은 젊은 엄마도 있고, 지팡이를 짚은 노인도 있습니다. 모두 물살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지요. 그 사람은 쉬지 않고 다시 나룻배에 오릅니다. 그리고 젖은 손으로 노를 저어 건너편으로 돌아갑니다.

관세음보살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이미 강을 건넜지만, 아직 건너지 못한 사람이 있는 한 쉬지 않으십니다. 불교에서는 괴로움의 세계를 ‘이쪽 언덕’, 깨달음의 세계를 ‘저쪽 언덕’이라 부릅니다. 『반야심경』의 ‘바라밀다’라는 말도 본래 저쪽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뜻을 담고 있지요.

우리 주변에도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큰 병원에서 평생 일하다 퇴직한 뒤 시골 보건지소로 내려간 의사, 높은 자리에서 물러나 동네 아이들 공부를 봐 주는 어른 같은 분들이지요. 그분들은 누가 시켜서 그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자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

앞에서 본 경전의 이름에는 ‘천수천안(千手千眼)’이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이라는 뜻입니다. 절에 가면 손이 여럿 달린 관세음보살상을 볼 때가 있지요. 처음 보면 낯설고 조금 무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뜻을 알면 마음이 달라집니다. 천 개의 눈은 세상 구석구석의 아픔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겠다는 마음입니다. 천 개의 손은 그 아픔마다 손을 내밀어 돕겠다는 마음이지요. 여기서 ‘천’은 꼭 숫자 천을 세는 말이 아닙니다. 끝없이 많다는 뜻으로 읽으면 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어머니들이 그러셨습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서도 우는 아이를 달래고, 밭일을 하면서도 집안일을 살피셨지요. 눈이 열 개라도 모자라고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셨습니다.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은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끝없이 넓힌 모습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서른세 가지 얼굴

보살로 내려오신 관세음보살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실까요. 「보문품」은 여기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부처의 몸으로 건져야 할 사람에게는 부처의 몸으로 나타나 법을 일러 준다고 합니다. 임금의 몸으로 건져야 할 사람에게는 임금의 몸으로 나타난다고 하지요.

경전에 나오는 모습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재산이 많은 장자(長者)의 모습, 집에서 수행하는 거사의 모습, 나랏일을 보는 관리의 모습이 있습니다. 스님의 모습, 집안 살림을 하는 부인의 모습도 있고, 사내아이와 여자아이의 모습도 있습니다. 이를 헤아려 서른세 가지 모습, 곧 ‘33응신(三十三應身)’이라 부릅니다. 응신이란 상대에게 맞추어 나타나는 몸이라는 뜻입니다.

이 책이 서른세 장으로 이루어진 것도 그래서입니다. 관세음보살의 서른세 가지 모습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서른세 가지 얼굴을 하나씩 살펴보려는 것이지요.

여기서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서른세 가지 모습 가운데 많은 수가 평범한 사람의 얼굴이라는 점입니다. 부자도 있고, 관리도 있고, 살림하는 부인도 있고, 아이도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은 늘 연꽃 위에 앉은 거룩한 모습으로만 오지 않습니다. 장터의 상인으로, 버스 옆자리의 낯선 사람으로, 때로는 우리 집 식구로 오십니다.

그런데 왜 알아보지 못할까

문제는 우리가 그분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상대에게 맞추어 오시니, 그 모습이 너무나 평범하기 때문입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 옆에 선 사람이 관세음보살일 수 있다고 누가 생각하겠습니까.

게다가 관세음보살은 늘 다정한 얼굴로만 오지 않습니다. 이 책에서 함께 생각해 보려는 것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나에게 거친 말을 하는 사람, 무례하게 구는 사람도 어쩌면 관세음보살일 수 있습니다.

처음 들으면 고개를 갸웃하실 것입니다. 나를 화나게 한 사람이 어떻게 관세음보살이냐고요. 하지만 조금만 돌아보면 그 뜻이 보입니다. 누군가의 거친 말에 내 마음이 상했다면, 나는 그 말이 얼마나 아픈지 몸으로 배운 것입니다. 그 사람은 “너는 그렇게 하지 마라”를 온몸으로 보여 준 셈이지요. 이런 사람을 반면교사(反面敎師)라고 합니다. 거꾸로 가르쳐 주는 스승이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따뜻한 사람도 있습니다. 먼저 인사를 건네는 이웃, 말없이 이야기를 들어 주는 친구가 그렇습니다. 그분들은 “이렇게 살아라”를 보여 주는 관세음보살입니다. 거친 사람과 따뜻한 사람은 얼굴이 다릅니다. 하지만 둘 다 나를 깨우러 온 분들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 훨씬 평범한 얼굴로 와 계십니다.

옛날 신라에 두 큰스님이 있었습니다. 의상대사(義湘大師)와 원효대사(元曉大師)입니다. 두 분 모두 관세음보살을 뵈러 동해 바닷가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한 분은 간절히 기도한 끝에 관세음보살을 만났고, 다른 한 분은 길에서 관세음보살을 마주치고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같은 시대를 산 두 큰스님 사이에 무엇이 달랐을까요. 다음 두 장에서 그 이야기를 차례로 들어 보겠습니다. 그 전에 오늘 하루 내가 만난 얼굴들을 가만히 떠올려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 가운데 관세음보살이 아닌 분이 과연 있었을까요.

관세음보살은 높은 곳에서 기다리지 않고,
낮은 곳으로 내려와 내 곁에 서 계십니다.

『관세음보살은 버스 정류장에도 계신다』 만나 보기

이 글은 책의 제1장입니다. 책에서는 이어서 낙산 바닷가에서 관세음보살을 만난 의상대사와, 길에서 마주치고도 알아보지 못한 원효대사의 이야기를 차례로 들려드립니다. 그리고 반말과 핀잔, 새치기와 약속 어김, 가족의 서운한 한마디처럼 우리가 날마다 겪는 일 속에서 관세음보살을 알아보는 법을 서른세 장에 담았습니다. 장마다 내일 해 볼 작은 실천 하나와 마음에 새길 한 줄이 있어, 하루 한 장씩 곁에 두고 읽기 좋습니다.

책의 문을 여는 프롤로그: 오늘 나에게 거친 말을 한 그 사람도 관세음보살이었습니다도 함께 읽어 보세요.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염불은 염불이란 무엇일까요?에서, 다라니 독송은 공지천에서 두 시간, 불정심관세음보살모다라니 400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 만난 얼굴 가운데 관세음보살이라 여겨지는 분이 있었다면 게시판에 함께 나눠 주세요. 다른 이야기는 불교이야기 목록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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