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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하씨 경태보 한국의 오래된 두번 째 오래된 족보

aulir 2024. 11. 2.

우리나라 대표적 성씨 중 하나인 진주 하씨(河氏)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진주 하씨는 경상남도 진주를 본관으로 하는 가문으로, 고려시대부터 현재까지 많은 명현과 충신을 배출했습니다. 2015년 기준, 약 226,143명에 이르는 진주 하씨들이 곳곳에서 선조들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진주 하씨의 시작, 그리고 세 개의 큰 줄기

진주 하씨의 역사는 백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비록 정확한 문헌은 남아있지 않지만, 백제 때부터 사대부의 문벌이었다고 전해져 오는데요.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는 진주(당시 진양) 지역의 대표적인 토착 호족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특히 고려 개국 당시 태조 왕건과 협력하여 토성(土姓)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어, 이 시기부터 진주 하씨의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진주 하씨 관련 이미지
진주 하씨 관련 이미지

진주 河氏의 최초 족보인 《경태보(景泰譜)》는 1451년(문종 1년)에 편찬되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족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 참고 :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족보

경태보의 서문에는 진주 河氏가 백제시대 타주(陀州) 시절부터 사대부의 문벌이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가문의 오랜 역사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진주 河氏는 크게 세 개의 파로 나뉘어 있는데, 각각의 파에는 저마다의 독특한 역사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시랑공파의 이야기

시랑공파의 시조는 하공진(河拱辰) 선생입니다. 그는 고려 현종 때 좌사시랑을 지냈는데, 1010년 거란과의 강화 교섭 중에 순절하셨습니다. 당시 거란의 무리한 요구에 맞서다 장렬히 순절하신 것인데요, 이는 진주 하씨 가문의 충절 정신을 보여주는 첫 번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사직공파의 전통

사직공파의 시조는 하진(河珍) 선생으로, 고려 정종과 문종 시대에 사직의 벼슬을 지냈습니다. 특히 하진의 9세손인 하즙은 문하찬성사와 수충좌리공신으로 진천부원군에 봉해졌는데, 이를 계기로 진주 하씨의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고 합니다.

단계공파의 형성

세 번째는 단계공파로, 하성(河成) 선생을 시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후에 사직공파의 계보로 밝혀졌지만, 독자적인 파를 이루며 가문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진주 河氏가 배출한 역사적 인물들

고려시대의 명현들

고려시대에 진주 하씨는 이미 많은 인재를 배출했습니다. 하윤원은 홍건적을 물리친 2등 공신으로 진산부원군에 봉해졌고, 하자종은 병부상서를 지내다가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이 되어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켰습니다.

조선 초기의 큰 인물들

조선 건국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하륜(河崙, 1347-1416)을 꼽을 수 있습니다.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하륜은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학문적 깊이를 겸비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연(河演, 1376-1453)은 세종, 문종 시대의 영의정을 지낸 명상이었습니다. 특히 청백리로 이름을 날렸는데, 이는 진주 하씨 가문의 청렴 정신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 중기의 충절

하위지(河緯地)는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단종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이러한 충절은 진주 하씨 가문의 정신적 유산이 되어 후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임진왜란 시기의 활약

임진왜란 때도 진주 하씨 가문은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웠습니다. 하계선은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했고, 하혼은 낙동강 연안 전투와 성주성 탈환작전에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하응상은 청주 금산 전투에서 두 아들과 함께 순절하는 등 나라를 위해 온 가문이 힘을 모았습니다.

조선 후기의 학문과 예술

하항(河沆, 1538-1590)과 하응도(河應圖, 1540-1610)는 남명 조식의 제자로서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고, 하수일(河受一, 1553-1612)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을 역임했습니다.

근현대의 선구자들

근현대에 들어서면서 진주 하씨 가문은 새로운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하규일은 구한말의 국악사이자 무용가로서 가곡의 정통을 지켰고, 하란사는 여류 선각자로서 미국 유학 후 이화학당에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특히 하경덕(河敬德, 1897-1951)은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으로 활동했으며, 하버드대학교에서 최초의 한국인 사회학 박사가 되어 근대 학문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진주 河氏의 항렬표, 가문의 질서를 담다

진주 하씨의 항렬자는 매우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는데요, 시랑공파와 사직공파의 항렬표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시랑공파 항렬표 (26세-32세)

세대돌림자

26세 현(賢) 수(秀)
27세 운(運) 도(圖)
28세 재(載) 치(致)
29세 진(鎭) 준(駿)
30세 영(永) 석(錫)
31세 근(根) 태(泰) 제(濟)
32세 병(炳)

사직공파 항렬표 (24세-44세)

세대돌림자

24세 경(慶)
25세 기(基)
26세 진(鎭)
27세 낙(洛) 홍(泓)
28세 영(榮) 룡(龍) 상(相)
29세 섭(燮) 용(容) 대(大)
30세 주(周) 재(在) 원(垣) 재(載)
31세 선(善) 호(鎬) 종(鍾) 석(錫)
32세 태(泰) 홍(洪) 청(淸) 옥(沃)
33세 래(來) 수(秀) 목(穆) 권(權)
34세 헌(憲) 성(性) 연(然)
35세 철(喆) 준(埈) 배(培)
36세 상(商) 정(鋌) 용(鏞)
37세 순(淳) 해(海) 구(求)
38세 동(東) 병(柄) 병(秉)
39세 희(熙) 열(烈)
40세 중(重) 규(圭)
41세 전(銓) 현(鉉)
42세 준(準) 영(永)
43세 식(植) 근(根)
44세 환(煥) 병(炳)

진주 河氏의 세거지, 뿌리 깊은 나무처럼

진주 하씨의 주요 집성촌은 5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합니다. 각 파별로 주요 세거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경상남도 지역의 세거지

시랑공파 후손들은 주로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 수곡면 사곡리, 금곡면 검암리 운문, 수곡면 효자리에 터를 잡았습니다. 사직공파 후손들은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옥종면 안계리에 주로 거주했습니다.

전라남도 지역의 정착

전라남도에서는 진도군 임회면 삼막리에 통덕랑공파가, 임회면 봉상리와 고군면 향동리에 고군 향동파가 자리 잡았습니다. 이들 집성촌은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대대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문화재와 유적, 가문의 자취를 따라서

진양하씨 단지종택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38호로 지정된 진양하씨 단지종택은 하협(河悏, 1583-1625)의 후손들이 지은 종가집입니다. 안채(1864년), 사랑채(1871년), 별채(1916년)로 구성되어 있으며, 솟을대문이 있는 중심채영역과 좌우 담장으로 구획된 전통적인 구조를 자랑합니다.

특히 마당에는 효자목이라 불리는 오래된 감나무가 있어, 가문의 효행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장 문화재의 가치

종택에는 약 5,000점의 고문서와 3,000책의 고서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특히 남명 조식 문인들의 자취를 담은 다양한 기록물은 조선 중기 영남 학파의 학문적 전통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진주하씨 묘 출토유물

국가민속문화재 제229호로 지정된 진주하씨 묘 출토유물에는 장옷, 창의, 저고리 등 81점의 의복류와 168점의 서간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17세기 초 복식사 연구와 당시 현풍지방의 풍속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현대의 진주 河氏, 전통을 잇고 미래를 열다

진주 하씨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디지털 관리 시스템 구축입니다. PC와 모바일에서 Moonbo를 검색할 수 있고, 계보 보기, 통계 분석 등 다양한 디지털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진주 河氏의 이야기를 조사하고 보니, 그들의 충절정신과 나라를 위한 호국의지가 이 나라를 지탱하게 했다는 생각에 숙연해졌습니다. 앞으로도 진주 하씨가 세계만방에 대한민국의 우월성을 널리 알리고, 우리나라 발전에 큰 기틀이 되길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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