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 정씨 가문의 역사와 전통을 찾아서
이번 글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명문가 중 하나인 동래 정씨(鄭氏)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신라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온 이 가문의 역사는 마치 한 편의 대하소설처럼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바닷가의 작은 고을에서 시작된 천년 가문
동해 바다를 마주한 작은 고을 동래, 오늘날의 부산 지역인 이곳은 원래 장산국 또는 내산국이라 불리던 독립된 소국이었습니다. 신라에 편입된 후 동래군이 된 이곳에서, 한 가문의 위대한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신라의 여섯 부촌 중 하나였던 진지촌의 촌장 지백호의 후손들이 이곳에서 뿌리를 내렸고, 그중 정회문이라는 인물이 동래 정씨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안일호장이라는 직책을 맡았던 그는 백성들을 위한 선정을 베풀어 큰 신망을 얻었다고 합니다.
고려시대 - 문학과 청백리의 전통을 세우다
고려 초기, 정지원이 보윤호장이 되면서 가문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합니다. 특히 이 시기에 활약한 정서는 대한민국 고전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정과정곡'을 지은 그의 문학적 재능은 후대까지 전해지는 가문의 자랑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정항이라는 인물의 이야기도 주목할 만합니다. 우사간과 충청도안찰사를 지낸 그는 청백리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는 훗날 동래 정씨 가문이 지켜나갈 중요한 가치가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 정승 집안으로 빛나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동래 鄭氏는 더욱 큰 번영을 이룹니다. 무려 17명의 정승과 198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으니, 그야말로 최고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주 이씨(22명), 안동 김씨(19명)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정승을 배출한 것으로,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광필과 정유길을 꼽을 수 있습니다.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은 기묘사화라는 험난한 시기에 신진 사림을 보호하려 노력했던 명재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손자 정유길 역시 대제학과 좌의정을 지내며 가문의 명성을 이어갔습니다.
효종과 현종 시대의 정태화는 무려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내며 가문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이처럼 뛰어난 인재들이 꾸준히 나오면서 동래 정씨는 조선의 대표적인 명문가로 자리잡게 됩니다.
동래 정씨 주요 분파와 항렬표
동래 鄭氏의 분파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 가문의 계보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주요 분파로는 동래군파, 판서공파, 좌의정공파 등이 있습니다. 각 분파는 조상들의 후손들이 세세하게 구분되어 있으며, 이는 가문의 역사와 전통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줍니다.
분파
동래 정씨의 분파는 다음과 같이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대분파 주요 세부분파
교서랑공파 | 전서공파, 정랑공파, 생원공파, 현감공파 |
첨사공파 | 학생공파, 호군공파, 수찬공파 |
호장공파 | 정선조의 후손들 |
항렬 체계
동래 정씨의 항렬은 다음과 같이 정리됩니다.
세대항렬자세대항렬자
29세 | 진(鎭) | 34세 | 진(鎭) |
30세 | 인(寅) | 35세 | 하(夏) |
31세 | 운(雲) | 36세 | 영(泳) |
32세 | 모(謨) | 37세 | 용(用) |
33세 | 수(秀) | 38세 | 우(愚) |
이 항렬표를 통해 각 세대의 이름을 구분할 수 있으며, 이는 가문의 전통을 이어가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가문의 정신 - "온화하고 불편부당하라"
동래 鄭氏 가문이 대대로 지켜온 가훈이 있습니다. "온화하고 불편부당하여 남과 적을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실제로 실천되었는데, 조선시대 당쟁이 치열하던 시기에도 동래 鄭氏 가문은 특정 당파에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을 지켰다고 합니다.
문화유산 - 시간이 멈춘 그곳에서
경기도 군포시에 가면 동래 정씨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 있습니다. 바로 동래 鄭氏 동래군파 종택인데요. 1783년에 지어진 안채와 1877년에 지어진 사랑채가 조선 후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ㄱ자형 안채를 중심으로 사랑채, 광채, 사당이 조화롭게 배치된 이곳은 현재 경기도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가까운 속달동에는 정란종 선생과 그의 두 아들의 묘역이 자리잡고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가문의 역사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현대로 이어지는 전통
오늘날 동래 鄭氏는 47만 명이 넘는 대가족이 되었습니다. 전체 정씨 중 22%를 차지하는 큰 규모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전통을 지키면서도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나가는 모습일 것입니다.
종친회는 군포문화원과 협력하여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부산 화지공원 보존에도 힘쓰고 있습니다. 족보를 디지털화하고 하버드대학교 옌칭도서관에 기증하는 등 전통문화의 현대화에도 앞장서고 있습니다.
새로운 천년을 향해
비교적 간단하게 소개했지만, 동래 鄭氏의 역사는 단순한 가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역사이자, 우리 전통문화의 한 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백리의 전통, 문학적 재능, 정치적 중립성 등 동래 鄭氏가 추구해온 가치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가 있습니다.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에는 여전히 160여 가구의 동래 鄭氏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선조들의 발자취를 이어가면서도, 현대사회에 맞는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장학사업을 통해 젊은 세대를 키우고, 문화유산 보존활동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어져 온 동래 정씨의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들이 지켜온 가치와 전통이 앞으로도 우리 사회에 발전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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