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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호소문, 눈물이났다

aulir 2024. 10. 18.
아내의 호소문 [나는 그들이 한 짓을 알고 있다 – 서른두 번째 이야기]

공직사회는 보기와는 다르게 인정으로 다져진 집단이다. 시골일수록 그 정도가 강하다. 감사를 받을 때, 상급자의 잘못도 본인의 불찰이라고 우긴다. 그게 전통이고 의리였다. 그런데 여기, 온갖 거짓과 모함으로 자신의 수하에 있던 직원의 밥줄을 끊어 놓은 자가 있다.

세상에 이런 공직자는 없다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최종 변론서 작성해야 하니까, 서울에 다녀가시죠."

아내의 호소문 관련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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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을 만나러 가는 길, 그날처럼 홀가분한 날도 없었다. 수없이 변호인 미팅을 위해 서울에 오르내리는 동안 별 상상을 다 했었다. '만에 하나 패소한다면 어쩔 것인가!'란 생각을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의식 저변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다 튀어나온 몹쓸 상상은 나를 암울하게 만들기도 했다.

만의 하나, 정말 이건 만의 하나다. 패소한다면 30년 넘은 공직 경력은 하루아침에 물거품 된다. 가장 큰 건 퇴직금과 연금이다. 실제 낸 금액만 받게 된다. 그것이 얼마가 될지 따져 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엄청난 타격은 불가피하다.

정년퇴직 후 조용한 시골에 집을 짓고 살겠다는 소박한 꿈도 산산조각이 나 버린다. 불명예란 멍에는 나를 처참히 무너뜨릴 건 뻔하다.

지금까지 정황을 볼 때, D당에서 개입했다는 심증은 너무도 뚜렷하다. 추 주무관이나 방 이장은 비슷한 시기에 일정 간격을 두고 차례로 경찰에 나가 진술했다. 우연이라 보기엔 경찰 움직임도 대단히 부자연스럽다.

D당 후보자로 나섰던 유서현(가명)은 내가 직원 시절 상사로 모셨던 사람이다. 데리고 있던 직원 밥줄을 끊어 놓는다는 건 공직사회에선 흔한 일이 아니다. 아니 '없다'란 표현이 적절하겠다. 감사를 받을 때, 상급자가 지시했던 일이었음에도 '내가 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으며, 상급자는 하급자들을 덮어주려 한다. 그게 공직사회의 오랜 전통이고 의리다.

"증인신문은 공판의 한 과정일 뿐입니다.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해봅시다. 탄원서도 받을 수 있으면 받아 주세요."


변호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탄원서. 효과가 없을지도 모른다. 탄원서란 말 그대로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고, 이러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그런 일을 저지를 자가 아니다'란 글에 연명을 받는 형식이다. 탄원서 받는 일은 남성면 한 단체에서 나섰다.

주민들이 탄원서를 냈다

「존경하는 판사님, 안녕하십니까. 저희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는 피고인 A 씨가 남성면장 재임할 때의 주민들입니다. 면장님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드리고자, 감히 이렇게 판사님께 펜을 들었습니다. 면장님은 평소 면민들 화합 및 행정과 주민 간 소통을 강조해 왔으며, 열린 행정을 지향해 왔던 사람입니다. 그는 재임 시 면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군부대와 지역 상인들 유대강화를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서도 큰 노력을 했으며, 특히 홀로 사시는 독거노인 등 어려운 이웃을 살피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또한, 면장은 평소 청렴하고 열정적으로, 직원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현장행정을 추진해 온 공직자입니다. 지역 유지들보다 어렵게 생활하시는 어르신들을 먼저 찾아 돌보는 인정미 넘치는 성품을 지녔으며, 면 주민들을 내 가족처럼 여기고, 훈훈한 지역 분위기를 만드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남성면은 수도권과 가까운 지역이라 귀농·귀촌인들이 많습니다. 밴드를 이용해 그들이 지역 원주민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소통할 수 있는 창구를 만들었으며, 행정이 늘 주민들 가까이 있다는 것을 몸소 실천한 사람입니다.

존경하는 판사님께서 면장 잘못이 있다 여기시더라도 30년 동안 지역발전을 위해 헌신 노력해 온 점과 앞으로 남은 공직기간 지역발전과 주민들을 위한 행정을 펼칠 기회를 한 번만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치 '면장이 잘못했으니 봐 달라'는 뉘앙스로 읽혔다. 사회단체 임원과 회원들 눈엔 '재판까지 갔으니 잘못이 전혀 없진 않을 거다'라고 본 모양이다. 토를 달지 않았다. 이들 성의를 무시하는 처사 같았기 때문이다. 주민서명은, 3일 만에 1,000명이 넘었다.

주민들 애정과 연민에 가슴 한쪽이 아렸다. 뜨끈한 물 한 줄기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면장 시절, 주민들에게 좀 더 가까이 가지 못했던 게 못내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울컥한 일은 또 있었다. 변호인에게 도착했다던 우편물 한 통. 아내가 쓴 호소문이다. 집사람은 내가 만류할지 모른다고 여겼던지 내 의견은 무시한 채, '판사에게 올리는 호소문'을 변호인에게 보냈다.

아내의 호소문, 평소 같으면 만류했다

「존경하는 판사님, 저는 이번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는 피고인 아내 김 00입니다. 먼저 판사님께 이런 편지를 올리게 된 것 자체가 외람되고 실례가 되는 줄 압니다만, 용기를 내 글을 쓰게 된 점에 대해 너그럽게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 남편은 30년이 넘는 공직생활 대부분을 일에만 몰두해 왔습니다. 가정일과 아이들 교육하는 것은 오롯이 제 몫이었습니다.

휴일에 제대로 쉬어 본 적도 없었고, 남들 다 간다는 가족휴가 한번 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넉넉지 못한 화전민 아들로 태어난 남편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를 마친 후 9급으로 공직을 시작했습니다.

늙으신 편모슬하에서 자라서인지, 어려운 노인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 탓에 의견 다툼도 많았습니다.

틈만 나면 집을 고쳐드린다고 나섰습니다. 주말에도 무슨 관광해설을 나간다는 둥 남편은 눈만 뜨면 사무실에 나가는 것이 일상이었고, 늦은 밤,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는 일도 많았습니다.

남성면장으로 있는 동안은 지역주민들과 함께해야 한다며 늘 관사에서 혼자 살았습니다. 남성면은 같은 군(郡) 내에 있지만, 주말부부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늘 아빠의 그런 모습을 봐온 아들은 절대로 공무원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랬던 사람이 갑자기 구속영장 실질심사가 이뤄지고 법정에 서게 되면서 집안은 그야말로 초상집이 되어 버렸습니다.

남편 잘못이 없다고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남편은 이제 2년 정도만 있으면 퇴직을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마음이야 어땠을지 모르지만, 특정 후보를 위해 선거운동을 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늘 그래왔지만, 남성면장으로 나가서는 오지랖 넓게도 '시골 마을이 도시화되는 것이 안타깝다. 주민들 간 소통을 통한 시골 고유인정을 되살리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워낙 SNS를 즐기던 남편이 밴드를 통해 행정과 주민들 간 차이를 줄이고 행정정보를 제공하려는 의도에서 본의 아니게 군수님에 대한 홍보성 글을 올렸던 거로 생각합니다.

제가 알았더라면 적극적으로 만류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남편도 이러한 행위가 범법인 줄 몰랐다고 매일 뉘우치고 있습니다.

이번 일로 인해 바쁘신 판사님께 심려를 끼쳐 드리게 된 것에 대해 남편을 대신해 머리 숙여 죄송하단 말씀을 드립니다.

존경하는 판사님께서 이번 한 번만 선처해 주신다면 남편의 남은 공직생활은 어렵게 생활하시는 어르신들과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위한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내조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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