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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 천직의 몰락, 예기치 못한 시련

直說(직설) 2024. 8. 28.
공직 천직의 몰락 [나는 그들이 한 짓을 알고 있다 – 두 번째 이야기]

내게 공직은 천직이었다. 면장으로 재직 중 사회단체장들이나 기관장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만나지 않았다. 소위 끗발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어렵게 생활하시는 분들을 찾아 아픔과 슬픔을 함께하는 게 좋았다. 그랬던 공직생활이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무너졌다.

난생처음 점쟁이를 찾았다

"공무원이시구먼. 재판 문제로 오셨네? 걱정하지 마라. 모든 진실이 밝혀질 겁니다. 가담자가 다섯이네. 그들 전부 쇠고랑 차는 모습이 보여!"

공직은 천진, 난생처음 점쟁이를 찾았다
공직은 천진, 난생처음 점쟁이를 찾았다

살면서 점쟁이를 찾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샤머니즘에 심취한 사람을 경멸하기까지 했었다. 그랬던 내가 점쟁이를 찾은 것이다.

세상이 미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생길 리 없다. 신(神)이 노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앞뒤 안 가리고 빨간 깃발이 달린 허름한 판잣집에 들어섰다. 남 눈치 볼 상황이 아니었다.

들어서자마자 점쟁이는 내 직업과 어떤 문제로 왔는지 맞혔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기겁할 노릇이다. 이뿐만 아니라, 홀어머니에 삼 형제 중 둘째란 말도 적중했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만 하면 뭐 하누. 증오가 철철 넘쳐나는데…."

하마터면 놀라 자빠질 뻔했다. 당시 아침마다 108배 기도를 했었다. 기도 내용은 '이번 사건이 명명백백히 밝혀져, 추형오(가명), 방호석(가명)이 처벌받게 해 주십사'였다. 대체 점쟁이는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공직을 천직으로 여겼던 공직생활

1989년, 지방공무원 9급 시험에 합격했다. 내 나이 29살. '하나밖에 없는 어미 고생시킨 게 고작 그거야?'라는 젊은 혈기에나 가질 수 있는 피해의식은 나를 강원도 어느 탄광 마을로 이끌었다.

고향에서 시험을 봤어도 너끈히 합격했을 점수인데, 마을 면사무소에 앉아있는 내 모습이 싫었다. 버스가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6시간 정도 걸려야 갈 수 있었던 곳. 꽤 먼 곳까지 탈출을 감행했다.

처음 내가 맡은 업무는 재무. '재무'의 사전적 의미는 '돈이나 재산에 관한 일'을 뜻하지만, 당시 면사무소 재무는 세금 받아오는 일이었다. 1990년대 어느 시(市) 공무원 세금 착복 비리가 터지기 전까지 공무원들이 직접 돈(세금)을 받았다.

세목도 제대로 모르면서 장부만 들고 외상값 받아오듯 세금을 걷었다. 주인을 만날 수 없는 집은 한밤중 방문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성실함(?)을 윗사람들은 좋게 평가했었나 보다. 이듬해 내게 '지역 동향관리업무'를 맡겼다.

마을에 어떤 일이 일어났고, 어떤 사람 성향이 어떤지를 파악해 보고하는 일이었다. 내가 작성한 보고서가 선거에 이용될 수 있다는 건 알지 못했다. 운이 좋았던지 예정 동향까지 정확하게 맞추는 일이 몇 차례 있었다. 가령 광부들이 언제 집회를 한다거나, 누가 누구를 만날 예정이라거나 하는 것들이었다. 군수 표창을 받을 거라는 소문도 돌았다.

2년이 지났을 즈음, 승진 인사가 있었다. 8급 승진 대상자 40명 중 4명이 제외됐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내가 4명에 끼어 있었던 것이다. 성실과 능력은 진급과 무관하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그 지역 출신이 아니거나 그곳 소재 고등학교를 나오지 않으면 승진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상위 직급일수록 그 정도가 심했다. 고향으로 전출 신청을 하게 된 이유였다.

고향 공직생활은 순탄했다. 염려했던 면사무소 근무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지자체 홈페이지가 없던 시절,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어 군청 기능을 대신토록 한 결과 대한민국 신지식인이 되기도 했다. 다소 튀는 행동이 동료 직원들에겐 못마땅하게 보였을지 모르겠으나, 지휘부 쪽에선 나쁘지 않게 평가했었나 보다.

예산, 지역경제, 홍보, 관광기획, 군정기획. 요직을 거쳐 공직 26년 만에 지방공무원 꽃이라는 사무관 진급도 했다. 사무관 초임 발령은 내 고향 남성면(가칭)이었다. 10여 개가 넘는 환영 현수막이 신기해 며칠간 잠을 설치기도 했다.

주민편의 면정을 펼쳐 나갔다. 어렵게 사시는 어르신들 부름엔 새벽도 마다하지 않았다. 만 3년간 부풀었던 행복이 무자비하게 깨지리란 건 단 한순간도 생각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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