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대사, 낙산 바닷가에서 관세음보살을 만나다

경전 이야기 ·

책 『관세음보살은 버스 정류장에도 계신다』의 제2장을 전해 드립니다. 『삼국유사』에 실린 이야기를 따라, 의상대사가 동해 낙산 바닷가에서 관세음보살의 참모습을 뵙고 낙산사를 세우기까지의 길을 걸어 봅니다.

동해 바닷가의 한 스님

천삼백여 년 전, 신라 동해 바닷가의 이른 아침을 떠올려 봅니다. 밤새 잠잠하던 바다가 해 뜰 무렵이 되자 다시 철썩입니다. 검은 바위 벼랑 아래에는 파도가 드나드는 깊은 굴이 하나 있습니다. 그 앞에 한 스님이 홀로 앉아 있습니다. 바닷바람에 가사 자락이 펄럭이는데도 스님은 꼼짝하지 않습니다.

그 스님이 의상대사(義湘大師)입니다. 대사는 지금 관세음보살을 만나려고 이곳에 와 있습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고, 만날 수 있다는 약속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 바닷가 굴에 관세음보살이 계신다는 말을 듣고, 그 말 하나를 믿고 찾아왔습니다.

이 이야기는 고려의 일연(一然) 스님이 엮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려 있습니다. 권3 「탑상(塔像)」 편의 「낙산이대성 관음·정취·조신(洛山二大聖 觀音·正趣·調信)」이라는 글입니다. 제목이 길지만 뜻은 어렵지 않습니다. 낙산에 깃든 두 큰 성인, 관음보살과 정취보살, 그리고 조신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뜻이지요. 이 장에서는 그 가운데 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을 만난 대목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먼 길을 돌아온 사람

의상대사는 신라 사람입니다. 젊은 시절 불법을 더 깊이 배우려고 바다 건너 당나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지엄(智儼)이라는 큰스님 밑에서 『화엄경(華嚴經)』을 공부했지요. 『화엄경』은 온 세상이 서로 그물처럼 이어져 있다는 가르침을 담은 큰 경전입니다.

『화엄경』에는 관세음보살이 계신 곳이 나옵니다. 「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 선재동자라는 젊은 구도자가 스승을 찾아 길을 떠나는데, 그 길에 관세음보살을 찾아뵙는 장면이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이 계신 곳은 바닷가의 산, ‘보타락가(補陀洛迦)’라고 했습니다.

『화엄경』을 깊이 공부한 의상대사가 이 대목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선재동자가 그랬듯이 대사도 관세음보살을 직접 뵙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라로 돌아온 뒤, 동해 바닷가 굴에 관세음보살의 참모습이 머무신다는 말을 듣고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낙산이라는 이름

『삼국유사』는 그곳을 ‘낙산(洛山)’이라 부르게 된 까닭부터 설명합니다. 서역, 곧 인도 쪽에 보타락가산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 이름을 빌려 왔다는 것입니다. 보타락가는 우리말로 ‘작은 흰 꽃’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한자로는 소백화(小白華)라고 적었지요.

그곳은 흰옷을 입은 큰 보살, 곧 백의대사(白衣大士)의 참모습이 머무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백의대사는 흰옷 입은 관세음보살을 높여 부르는 말입니다. 보타락가의 ‘낙’ 자를 따서 낙산이라 이름 붙인 것이지요. 지금의 강원도 양양 바닷가입니다.

잠시 그 뜻을 새겨 봅니다. 관세음보살이 계신 곳은 높은 하늘 궁전이 아니었습니다. 파도가 들이치는 바닷가, 사람이 사는 땅의 끝자락이었습니다. 관세음보살은 처음부터 사람 곁에 계시려는 분이었던 것입니다.

첫 번째 이레

의상대사는 곧바로 굴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먼저 이레 동안 재계(齋戒)를 했습니다. 재계란 음식과 행동을 삼가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일입니다. 귀한 손님을 맞기 전에 집 안을 쓸고 닦듯이, 대사는 자기 마음부터 닦았습니다.

이레째 되는 날 새벽, 대사는 자리에 깔고 앉던 방석을 바닷물 위에 띄웠습니다. 그러자 용과 하늘의 무리, 곧 불법을 지키는 여덟 무리의 신들이 나타나 대사를 모시고 굴 안으로 이끌었다고 합니다.

굴 안에서 대사는 허공을 향해 절을 올렸습니다. 그러자 허공에서 수정으로 된 염주 한 꾸러미가 내려왔습니다. 대사는 그것을 받들고 물러 나왔습니다. 동해의 용도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알을 바쳤습니다. 여의보주는 뜻하는 것을 이루어 준다는 귀한 구슬입니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다면 대사는 꽤 만족했을 법합니다. 하늘이 내린 수정 염주와 용왕이 바친 구슬을 받았으니까요. 보통 사람이라면 귀한 선물을 품에 안고 산을 내려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의상대사가 찾던 것은 구슬이 아니라 관세음보살 그분이었습니다.

두 번째 이레, 그리고 참모습

의상대사는 다시 이레 동안 재계를 했습니다. 선물은 받았지만 아직 관세음보살의 얼굴은 뵙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닷바람 속에서 또 한 번 이레를 견디는 일이 쉬웠을 리 없습니다. 그래도 대사는 같은 자리에서 같은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관세음보살의 참모습, 곧 진용(眞容)을 뵈었습니다. 『삼국유사』는 그때 관세음보살이 대사에게 하신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이 자리 위쪽 산꼭대기에 대나무 한 쌍이 솟아날 것이니, 그 땅에 불전을 지으면 마땅하리라.

— 『삼국유사』 권3 탑상 「낙산이대성 관음·정취·조신」

대사가 굴에서 나와 산으로 올라가 보니, 과연 땅에서 대나무가 솟아나 있었습니다. 대사는 그 자리에 금당(金堂)을 짓고 관세음보살상을 빚어 모셨습니다. 『삼국유사』는 그 상이 원만한 얼굴에 고운 모습이어서 마치 하늘이 낸 것 같았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 뒤에 신기한 일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솟아났던 대나무가 다시 땅속으로 사라진 것입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이곳이 참으로 관세음보살의 참모습이 머무는 곳임을 알았다고 합니다. 대사는 절 이름을 낙산사(洛山寺)라 했습니다. 그리고 받은 두 구슬을 성스러운 전각에 모셔 두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무엇이 의상대사를 만나게 했을까

이 이야기를 천천히 다시 읽어 보면 몇 가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을 만날 수 있었던 까닭이 이야기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첫째는 간절함입니다. 대사는 관세음보살이 계신다는 말을 듣고 그 말을 가볍게 넘기지 않았습니다. 바닷가 끝까지 몸소 찾아갔습니다. 마음 깊이 바라는 사람은 결국 길을 나서게 됩니다.

둘째는 마음을 닦는 일입니다. 대사는 만나기 전에 먼저 재계를 했습니다. 흐린 물에는 달이 비치지 않습니다. 마음이 욕심과 조급함으로 흐려져 있으면 눈앞의 관세음보살도 보이지 않습니다. 대사는 그것을 알았기에 먼저 자기 마음의 물부터 맑게 했습니다.

셋째는 기다림입니다. 대사는 이레를 두 번 견뎠습니다. 첫 이레 끝에 받은 선물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이레를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흔히 조금 해 보고 안 되면 그만둡니다. 대사는 만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습니다.

넷째는 받은 것을 내려놓는 마음입니다. 대사는 수정 염주와 여의보주를 자기 바랑에 넣어 가지 않았습니다. 절에 모셔 두고 빈손으로 떠났습니다. 관세음보살을 만난 사람은 무엇을 더 가지려 하지 않습니다. 이미 가장 귀한 것을 만났기 때문이지요.

간절히 찾고, 마음을 닦고, 끝까지 기다리는 사람이 관세음보살을 알아봅니다.

만남은 일로 이어진다

하나 더 눈여겨볼 대목이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이 의상대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뜻밖에도 깊은 진리를 들려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기 대나무가 솟는 곳에 절을 지어라.” 해야 할 일을 일러 주셨습니다.

관세음보살을 만난 경험은 그 자리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대사는 산에 올라 땅을 고르고 전각을 세웠습니다. 그 절은 뒷날 수많은 사람이 찾아와 기도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간절한 만남이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의 위안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낙산사는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여러 차례 불타고 다시 지어졌습니다. 2005년 봄에도 큰 산불이 나서 많은 전각이 잿더미가 되었지요. 그래도 사람들은 다시 절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지금도 그 바닷가에는 관세음보살을 찾아가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에게서 따뜻한 위로를 받았다면, 그 경험은 거기서 끝나지 않아야 합니다. 이번에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그 위로를 건넬 차례입니다. 관세음보살을 만난 사람은 저도 모르게 관세음보살을 닮아 갑니다.

우리 곁의 낙산 바닷가

이렇게 생각하면 의상대사의 이야기는 먼 옛날 큰스님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날마다 저마다의 바닷가에 서 있습니다. 시장 골목이 그렇고, 병원 대기실이 그렇고, 버스 정류장이 그렇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수많은 얼굴을 만납니다. 그 가운데 어떤 얼굴은 다정하고, 어떤 얼굴은 퉁명스럽습니다. 의상대사처럼 마음을 맑게 하고 바라보면, 그 얼굴들 너머에서 관세음보살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같은 바닷가를 찾아갔으면서도 관세음보살을 알아보지 못한 분이 있었습니다. 의상대사와 함께 신라 불교를 대표하는 원효대사(元曉大師)입니다. 원효대사는 길 위에서 관세음보살을 마주치고도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토록 지혜로운 분이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다음 장에서 그 이야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흐린 물에는 달이 비치지 않습니다.
마음을 맑게 닦은 사람에게 관세음보살이 보입니다.

『관세음보살은 버스 정류장에도 계신다』 만나 보기

이 글은 책의 제2장입니다. 책에서는 이어서 길 위에서 관세음보살을 마주치고도 알아보지 못한 원효대사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그리고 반말과 핀잔, 새치기와 약속 어김, 가족의 서운한 한마디처럼 우리가 날마다 겪는 일 속에서 관세음보살을 알아보는 법을 서른세 장에 담았습니다. 장마다 내일 해 볼 작은 실천 하나와 마음에 새길 한 줄이 있어, 하루 한 장씩 곁에 두고 읽기 좋습니다.

앞 장인 관세음보살은 어떤 분일까, 부처이면서 보살로 남은 분과 책의 문을 여는 프롤로그: 오늘 나에게 거친 말을 한 그 사람도 관세음보살이었습니다도 함께 읽어 보세요.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염불은 염불이란 무엇일까요?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염불하며 겪은 이야기는 게시판에 함께 나눠 주세요. 다른 이야기는 불교이야기 목록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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