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라니, 왜 뜻을 풀이하지 않고 원음 그대로 외울까

이 사이트에서 불정심관세음보살모다라니의 원문을 소개해드릴 때, 이렇게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다라니는 뜻으로 해석하기보다 정해진 소리 그대로 정성껏 따라 읽는 것이 전통적인 방식입니다.” 처음 다라니를 접하시는 분이라면 이 대목에서 자연스레 궁금증이 생기실 수 있습니다. “왜 굳이 뜻도 모르고 외워야 할까?”

오늘은 이 질문에 답해보려 합니다. 다라니라는 말의 본래 뜻은 무엇인지, 왜 예로부터 번역하지 않고 원음 그대로 지녀왔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우리가 이해하고 마음에 새길 수 있는 부분은 어디까지인지, 차근차근 짚어드리겠습니다.

1. 다라니(陀羅尼)라는 말의 본래 뜻

다라니는 산스크리트어 어근 “드리(dhṛ)”에서 비롯된 말로, “기억하다”, “보존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아시아에서는 이를 총지(總持) 또는 능지(能持)라고 번역해왔습니다. “모든 것을 총괄하여 지닌다”는 뜻입니다.

용수보살의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는 다라니를 이렇게 풀이합니다. 능지(能持)란 온갖 법을 모아 능히 간직하여 흩어지거나 잃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이를 마치 둥근 그릇에 물을 가득 담아도 새지 않는 것에 비유합니다. 능차(能遮)란 악하거나 선하지 못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 악한 죄를 짓고 싶어도 실제로 행하지 못하도록 붙잡아주는 힘을 뜻합니다.

즉 다라니는 처음부터 단순한 “주문”이 아니라, 한량없는 가르침을 한 몸에 응축해서 지니고, 동시에 그릇된 마음을 막아주는 그릇이라는 개념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실제로 대승불교 초기 경전에서는 다라니가 경전 전체를 외우는 것을 돕는 기억법으로 처음 등장했고, 이후 점차 그 다라니를 설하신 불보살의 원력에 의지해 가피를 구하는 수단으로 발전해왔습니다.

다라니를 번역하지 않는 이유

2. 다라니를 번역하지 않는 다섯 가지 이유

당나라의 삼장법사 현장은 인도에서 수많은 경전을 가져와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특정 용어들은 번역하지 않고 원음 그대로 음역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이를 오종불번(五種不翻), 즉 “번역하지 않아야 할 다섯 가지 경우”라고 합니다. 다라니는 바로 이 원칙이 가장 뚜렷하게 적용되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 다섯 가지 이유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비밀고(秘密故) — 비밀스러운 언어이기 때문

다라니는 본래 비밀스러운 언어로 여겨집니다. 이를 문자 그대로 번역해버리면, 그 안에 담긴 신비함과 미묘한 뜻이 사라져버린다는 것입니다. 밀교 전통에서는 다라니를 부처님과 보살의 깊은 경지에서 나온 언어로 보아, 함부로 그 뜻을 풀어 세속의 언어로 옮기는 것을 조심스럽게 여겼습니다.

둘째, 다함고(多含故) — 한마디에 많은 뜻이 담겨 있기 때문

다라니의 한 구절, 한 음절에는 하나의 뜻만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봅니다. 만약 이를 하나의 한국어 단어나 문장으로 번역해버리면, 그 안에 담긴 무수한 의미 중 극히 일부만 남고 나머지는 잘려나가 버립니다. 그래서 원음을 그대로 두어, 그 안에 담긴 다층적인 의미를 온전히 보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셋째, 차방무고(此方無故) — 이 지역에는 없는 것이기 때문

다라니가 담고 있는 개념이나 대상이 인도에는 있으나 중국(그리고 이를 전해 받은 우리나라)에는 본래 존재하지 않는 경우, 애초에 이를 옮길 마땅한 단어 자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억지로 뜻을 지어내기보다, 원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고 보았습니다.

넷째, 순고고(順古故) — 예로부터 그렇게 써왔기 때문

다라니는 오랜 세월 동안 이미 원음 그대로 사용되어 왔고, 그로써 많은 이들이 그 소리와 형태를 통해 이미 익숙하게 그 뜻을 체득하고 있습니다. 굳이 새삼 번역하지 않아도 전통 속에서 이미 통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존중고(尊重故) — 존귀하고 소중하기 때문

다라니는 그 자체로 존경받고 소중히 여겨지는 대상입니다. 이를 세속의 언어로 풀어버리면 그 본래의 존귀함과 무게가 옅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보살의 명호를 함부로 다른 말로 바꾸어 부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다섯 가지 이유가 오늘날까지 다라니가 번역되지 않고 음역된 형태로 전해 내려오는 근본적인 배경입니다.

3. 그래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있습니다

다라니 전체를 뜻으로 풀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관세음보살께 귀의하는 다라니들은 첫머리에 공통된 귀의(歸依)의 구조를 지니고 있어, 이 부분만큼은 어느 정도 그 뜻을 짚어볼 수 있습니다.

불정심관세음보살모다라니의 첫 소절,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는 산스크리트어 “나모 라뜨나 뜨라야야(namo ratna-trayāya)”에 가까운 음으로, “삼보(三寶, 불·법·승)께 귀의합니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나막 아리야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사다바야 마하사다바야 마하가로니가야”는 “나마 아리야 아발로키테스바라야 보디사뜨바야 마하사뜨바야 마하까루니까야”에 가까운 음으로 풀이됩니다. 이는 각각 “거룩하신 관자재보살, 그 크신 존재, 크게 자비로우신 분께 귀의합니다”라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즉 다라니의 첫머리는 대개 “삼보와 관세음보살께 지극히 귀의합니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한다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이트에서 소개해드린 천수경의 신묘장구대다라니 역시 거의 동일한 형태의 귀의문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관세음보살께 귀의하는 여러 다라니들이 같은 신앙적 뿌리에서 나왔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4. “다냐타”와 “사바하” — 다라니 속 이정표

다라니를 여러 번 독송하다 보면, 유독 자주 반복되는 두 표현을 만나게 됩니다. 이 둘은 뜻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다냐타(怛姪他, tadyathā)

“다냐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이제 이와 같이 설하노니” 또는 “즉설주왈(卽說呪曰, 곧 주문을 설하여 말하되)”에 가까운 뜻을 지닌 표현입니다. 앞선 귀의와 발원의 구절이 끝나고, 본격적인 진언의 핵심 구절로 넘어간다는 것을 알리는 일종의 이정표라 할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의 마지막 진언 앞에 나오는 “즉설주왈”이라는 구절과 정확히 같은 역할을 합니다.

사바하(娑婆訶, svāhā)

거의 모든 진언과 다라니의 끝맺음에 등장하는 말입니다. “원만하게 이루어지이다”, “이루어지리라”는 축원과 성취의 뜻을 담고 있다고 널리 이해됩니다. 발원과 서원을 마무리 짓는 매듭과 같은 표현으로, 다라니를 독송하는 이의 정성과 발원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이 짧은 두 음절에 응축되어 있는 셈입니다.

5. 뜻을 다 몰라도 괜찮은 이유

여기까지 오면 다시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뜻도 모르는 중간 부분은 그냥 의미 없이 소리만 내는 것인가?”

앞서 소개해드린 대지도론의 가르침을 다시 떠올려보면, 다라니의 힘은 반드시 “뜻을 알아야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라니는 소리 그 자체에 이미 온갖 법과 공덕을 지니고 있는 그릇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이를 삼마지총지(三摩地摠持), 즉 다라니를 받아 지니는 힘으로 지혜가 드러나 온갖 삼매를 깨칠 수 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어린 시절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한 채로 부모님이나 스승에게서 배운 좋은 말씀을, 시간이 지나 삶 속에서 자연스레 그 의미를 하나씩 체득해나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다라니 독송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낯선 소리의 나열처럼 느껴지더라도, 정성껏 반복하는 그 시간 자체가 이미 마음을 다스리고 흐트러진 생각을 가라앉히는 수행이 됩니다. 뜻을 몰라도 그 소리에 마음을 온전히 싣는 것, 이것이 예로부터 전해져 온 주력(呪力) 수행의 핵심입니다.

6. 독송하실 때 참고하시면 좋은 점

  • 정확한 발음을 익히려 노력하시되, 완벽에 집착하지 마세요. 다라니는 오랜 세월 구전되며 지역과 판본마다 미세한 음의 차이가 있어왔습니다. 지나치게 발음 하나하나에 얽매이기보다, 꾸준히 반복하며 자연스럽게 익혀가시는 것이 좋습니다.
  • 귀의문(첫머리)만큼은 뜻을 새기며 독송해보세요. 오늘 살펴본 것처럼 첫머리는 “삼보와 관세음보살께 귀의합니다”라는 뜻이 확인되니, 이 부분만큼은 그 마음을 되새기며 독송하시면 훨씬 깊은 정성이 담깁니다.
  • “다냐타”에서 마음을 한 번 가다듬어보세요. 이 지점이 본격적인 진언으로 넘어가는 이정표이니, 여기서 잠시 호흡을 고르고 마음을 다잡으신 뒤 이어가시면 좋습니다.
  • 마지막 “사바하”에서 발원을 떠올려보세요. “원만히 이루어지이다”라는 뜻이니, 이 대목에서 오늘 독송하며 품었던 마음이 이루어지기를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그려보시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마치며

다라니를 번역하지 않고 원음 그대로 지녀온 전통에는, 단순한 관습이 아니라 “언어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것을 언어로 억지로 가두지 않겠다”는 깊은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뜻을 다 알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다만 오늘 살펴본 귀의문의 의미, 그리고 다냐타와 사바하가 지닌 이정표로서의 역할만큼은 마음에 새기고 독송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그렇게 소리와 마음이 하나가 될 때, 다라니는 비로소 단순한 문자의 나열을 넘어 살아있는 수행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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