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과 효의 상징 영양 천씨(潁陽 千氏) 가문을 말하다
이번 포스팅은 한국의 명문가 중 하나인 영양 천씨(千氏) 가문의 역사와 전통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자 합니다. 충과 효를 중시하며 나라와 가문을 위해 헌신해 온 영양 천씨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시겠습니다.
시조와 본관의 유래
영양 천씨의 시조인 천암(千巖)은 중국 서촉 종북산(현재의 사천성 성도 남부) 아래 천고봉 만인암에서 태어났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선조의 이름이 출생지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인데, 천고봉의 '천(千)'을 성으로, 만인암의 '암(巖)'을 이름으로 하여 '천암'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본관인 영양(潁陽)은 중국 하남성 등봉현의 영양진에서 유래했습니다. 이곳은 고대 중국의 왕도였던 낙양과 정주 사이의 쑹산 근처에 위치한 유서 깊은 곳으로, 가문의 역사적 정통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중시조의 위대한 공적
영양 千氏 가문의 우리나라 정착은 중시조인 천만리(千萬里) 선조로부터 시작됩니다. 1543년에 태어난 천만리 는 13세라는 어린 나이에 경과에 급제하고, 1571년에는 무과 장원급제라는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영량사 겸 총독장으로 조선에 파병되어 두 아들(천상, 천희)과 함께 평양, 곽산, 동래 등지에서 왜군을 물리치는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공적으로 자헌대부 봉조하의 벼슬을 받고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으며, 297만㎡에 달하는 사패지를 하사 받았습니다.
충효의 전통을 이어온 가문
영양 천씨 가문의 가훈은 그 자체로 가문의 정신을 잘 보여줍니다.
"가정을 잊고 나라일을 걱정함은 충(忠)이요,
적을 이겨 난리를 극복함은 장(壯)이며,
부모를 정성껏 모시는 것은 효(孝)"
특히 효행과 관련해서는 조선명륜록에 5대 연속으로 효자가 기록될 정도로 그 전통이 깊습니다. 천성태 선조는 부모님을 위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수명을 연장케 했고, 그의 아들 천세모 또한 뛰어난 효행으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천술운, 천상련, 천우형 선조들의 여묘살이는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여막 곁에 샘물이 솟아났다는 '효자천'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고 있습니다.
영양 천씨의 종파
영양 천씨는 중시조 천만리의 두 아들을 중심으로 10개의 주요 파로 나뉩니다.
천상(장남)의 후손 파
- 처사공파 (태지 계열)
- 선전공파 (경주 계열)
- 정랑공파 (태주 계열)
- 통덕랑공파 (태진, 태석 계열)
- 송암공파 (태종 계열)
천희(차남)의 후손 파
- 영장공파 (운주 계열)
- 군수공파 (거주 계열)
- 현감공파 (자주 계열)
- 감역공파 (장주 계열)
영양 천씨 대동 항렬표
세대항렬자
13세 | 기(冀) 익(翼) 우(愚) |
14세 | 봉(鳳) 윤(胤) 욱(旭) |
15세 | 병(昞) 병(柄) 병(丙) |
16세 | 우(宇) 영(寧) 필(弼) |
17세 | 성(成) 세(歲) 기(璣) |
18세 | 희(熙) 범(範) 기(杞) |
19세 | 용(庸) 강(康) |
20세 | 재(宰) 벽(壁) |
21세 | 정(廷) 임(任) |
22세 | 규(揆) 규(葵) |
23세 | 홍(洪) 해(海) |
24세 | 임(林) 식(植) |
25세 | 영(煐) 형(炯) |
26세 | 균(均) 기(基) |
영양 천씨의 시대별 주요 인물
시조 시대
시조이신 천암(千巖)은 명나라 홍무 연간에 도총장, 판도승상을 역임하며 가문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임진왜란 시대
중시조인 천만리(千萬里)는 1571년 무과 장원급제 후 임진왜란 때 명나라 영량사 겸 총독장으로 참전해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공적으로 충장공(忠莊公)이라는 시호를 받고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습니다.
천만리의 두 아들도 큰 족적을 남겼는데, 장남인 천상(千祥)은 한성부좌윤 겸 오위도총관을 역임했고, 차남인 천희(千禧)는 평구도찰방을 지냈습니다.
조선 후기
천만리의 4대손인 천찬석은 안악 군수, 황주 목사, 경기도 광주 부윤을 역임했고 병자호란 이후 석대동의 입향조가 되었습니다.
가문의 문화유산
사당 및 서원
1. 황강서원
-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갈지리 우봉산 자락에 위치
- 중시조 천만리의 영정과 상파조 천상의 위패를 봉안
2. 호암서원
- 경상남도 고성군 동해면 장좌리에 소재
- 매년 음력 8월 1일에 향사를 지냄
3. 분향사
- 전남 장성 남면 분향리에 위치
- 영양 천씨 입향조를 비롯한 여러 선조를 배향
정자 및 건축물
1. 향포정
- 전남 장성 남면 분향리에 위치
- 1900년 천락호(1832~1907)가 건립
- 1919년 아들 천봉근과 손자 천세욱이 기와로 중수
묘소 및 기타 유적
1. 천장군묘
- 전북 남원시 금지면 방촌리 환봉산에 위치
- 중시조 천만리의 묘소
2. 효열각
- 전남 장성 남면 분향리에 위치
- 1938년 건립
- 천병학의 부인을 기리는 건물
종친회 현황 및 활동
중앙종친회
영양 천씨 중앙종친회는 전국 단위의 종친회를 운영하며 종친 간의 화합과 결속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문중족보 제작 작업을 주도하고 있으며, 정기적인 시제와 문중행사를 주관하고 있습니다.
지역종친회
고성, 강진, 장흥 등 각 지역별로 종친회가 조직되어 있으며, 정기총회와 만찬행사, 노래자랑 등을 통해 종친 간의 화합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역사회 발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족보 관리 현황
족보의 역사
1903년(광무 7년)에 간행된 영양천씨세보가 기본이 되어 1981년에 한문으로 제작된 족보가 있으나, 젊은 세대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새로운 족보 제작
현재 중앙종친회 주도로 새로운 족보 제작이 진행 중입니다. 한글로 표기하여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개편하고 있으며, 목차를 만들어 후손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조상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구성하고 있습니다.
시제 및 제례 전통
시제 진행
음력 10월 13일부터 각 소문중 파별로 시제를 진행하고 있으며, 각 소문 중에서는 아들들이 돌아가며 시제를 주관하고 있습니다. 젊은 세대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절차를 간소화하는 등의 노력도 기울이고 있습니다.
주요 제례 시설
남원 환봉사에서는 중시조 천만리와 두 아들의 시제를 봉행하고 있으며, 호암서원과 황강서원에서도 정기적인 제례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현대화를 위한 노력
종친회 현대화
1. 족보 현대화
- 한문 족보의 한글화 작업 진행
- 디지털 족보 시스템 구축
- 검색 기능 강화로 접근성 개선
2. 제례 의식 간소화
- 젊은 세대 참여 독려
- 시제 진행 방식 현대화
- 종친 간 소통 강화
지역사회 발전 기여
1. 종친회 활동
- 정기적 모임을 통한 발전 방안 논의
- 지역사회 발전에 적극적 참여
- 다양한 문화행사 개최
2. 화합 행사
- 정기총회와 만찬행사
- 세대 간 소통 프로그램
- 지역별 네트워크 구축
문화유산 보존 및 계승
1. 시설 현대화
- 종친회관 건립 추진
- 제각 및 사당 보수
- 복합문화공간 조성 계획
문화유산과 전통의 계승
영양 千氏 가문은 여러 중요한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황강서원에는 중시조 천만리의 영정과 상파조 천상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호암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8월 1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전남 장성의 분향사에서는 영양 천씨 입향조를 비롯한 여러 선조들을 배향하고 있습니다.
특히 매년 5월에는 한국의 영양 千氏 종친회원들이 중국 허난성 덩펑 시에 있는 가문 사당을 방문하여 중국 천씨 종친회와 함께 제를 지내며, 뿌리를 잊지 않고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현대의 영양 천씨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남한에는 100,014명의 영양 천씨가 거주하고 있으며, 남북한과 해외를 통틀어 약 20만 명이 있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며 가문의 명예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종친회에서는 젊은 세대와의 소통을 강화하고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족보의 한글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제례 의식을 현대에 맞게 간소화하는 등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전통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맺음말
영양 千氏는 충과 효를 근간으로 하는 가문의 전통을 굳건히 지켜오면서도, 시대의 변화에 맞춰 끊임없이 발전해 나가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의 충절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나라와 가문을 위해 헌신해 온 영양 천씨의 역사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됩니다. 앞으로도 영양 천씨 가문이 더욱 발전하여 한국 사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나가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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